이발사의 장부
250년 전, 권리는 천재의 분노가 아니라 한 식탁에서 태어났다
1775년 2월 23일 목요일, 파리 코메디프랑세즈에서 「세비야의 이발사」가 초연됐다. 객석은 싸늘했다. 다섯 막은 관객의 인내심에 비해 한 막쯤 길었고, 웃어야 할 대목에서는 웃음 대신 부채 소리가 났다. 여기서부터가 보마르셰답다. 그는 원고를 붙들고 한 막 분량을 통째로 들어냈고, 사흘 뒤인 일요일 밤 네 막으로 줄어든 이발사는 파리를 웃겼다. 좋은 작가란 자기 문장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필요하면 그 문장을 버릴 줄 아는 사람이다.
그는 실패조차 그냥 버리지 않았다. 그해 희곡을 책으로 펴내면서, 그는 「세비야의 이발사의 실패와 비평에 관한 절제된 편지」라는 긴 서문을 붙였다. 제목과 달리 그다지 절제되지 않은 그 편지에서, 그는 자기를 난도질한 비평가들에게 어느 때보다 유쾌하게 응수했다. 실패마저 원고로 만드는 사람. 나는 이런 사람을 동업자로서 깊이 존경한다.
문제는 성공 이후에 시작됐다. 당시 코메디프랑세즈와 작가 사이에는 흥미로운 규칙이 있었다. 작가는 공연 수입의 일정한 몫을 받았지만, 수입이 정해진 기준 아래로 한 번만 떨어져도 작품은 영영 극단의 소유가 되었다. 사람들은 이를 '규칙 속으로 떨어졌다'고 불렀다.
그 수입을 계산하는 사람은 물론 극단이었다. 경비는 넉넉하게 부풀었고, 연간 좌석 예약 같은 수입은 슬그머니 장부 밖으로 빠졌다. 그렇게 하면 만석이 이어지는 흥행작도 장부 위에서는 얼마든지 떨어질 수 있었다. 작품은 무대 위에서 살아 있는데, 장부 위에서는 이미 죽어 있었다.
1777년 1월 3일, 배우 한 사람이 보마르셰의 집을 찾아왔다. 서른두 번의 공연에 대한 작가 몫이라며 4,506리브르를 내밀었다. 계산서는 없었다. 보마르셰는 돈을 돌려보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앞으로 작가와 배우 사이의 모든 정산에 본보기가 될 정확한 계산서라고 했다. 공연은 몇 번이었고, 매회 얼마가 들어왔고, 무엇을 빼고 이 숫자가 나왔는가. 돈을 거절하고 영수증을 달라는 사람은 어느 시대에나 상대하기 가장 피곤한 부류다. 협상은 한없이 늘어졌다.
그러자 그는 칼을 가는 대신 식탁을 차렸다. 반년 뒤인 7월 3일 저녁, 보마르셰는 동료 극작가 스물두 명을 자기 집으로 불렀다. 그날 무슨 요리가 나왔는지는 기록에 없지만, 안건은 남았다. 한 사람의 이름난 작가가 혼자 싸우는 대신, 작가들이 함께 사무국을 두고 함께 장부를 따지자는 것이었다. 그 식탁은 훗날 SACD, 프랑스 극작가·작곡가 협회가 되었다. 1791년 혁명정부는 살아 있는 작가의 동의 없이 그의 작품을 공연할 수 없다는 법을 만들었다.
한 가지를 덧붙이자면, 보마르셰는 떼인 돈에 관한 한 당대 최고의 전문가였다. 그는 미국 독립전쟁 때 혁명군에 무기와 물자를 댔는데, 그 대금을 끝내 받지 못했다. 미국 의회는 그가 죽고 서른여섯 해가 지난 1835년에야 후손들에게 선택지를 내밀었다. 80만 프랑을 받고 모든 청구를 포기하든지, 아무것도 받지 말든지. 후손들은 80만 프랑을 받았다.
그런 사람이 몇 해 뒤 쓴 「피가로의 결혼」에서 하인 피가로는 귀족 주인에게 이렇게 쏘아붙인다. 당신이 한 일이라곤 태어나는 수고뿐이지 않느냐고. 무대 위의 대사였지만, 나는 그 문장에서 극단 장부를 한 장씩 넘기던 작가의 손가락을 본다.
이 이야기에서 내가 좋아하는 대목은 두 가지다. 권리는 천재의 분노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사람들이 한 식탁에 둘러앉는 데서 태어났다. 그리고 그들이 처음 요구한 것은 돈이 아니라 장부였다. 이백오십 년이 지난 지금도 창작자들이 가장 먼저 꺼내는 말은 놀라울 만큼 같다. “제 작품이 몇 번 쓰였는지만이라도 알려주시겠어요.”
의궤 한 권과 고속철
돌아온 의궤가 '갱신'이라는 단어를 꼬리표처럼 달고 온 이유
한국과 프랑스가 처음 마주한 테이블은 식탁이 아니라 갑판이었다. 1866년 가을,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들어왔고 떠날 때 외규장각의 의궤 297책을 싣고 갔다. 왕실의 혼례와 장례와 잔치를 그림과 글로 꼼꼼히 남긴 책들이었다. 누가 어디에 서고, 무엇을 얼마나 썼는지까지 적어둔 기록. 말하자면 왕실의 장부였다. 스무 해 뒤인 1886년, 두 나라는 한성에서 조약을 맺고 공식적으로 수교했다. 올해가 그 140주년이다.
의궤가 다시 테이블에 오른 것은 1993년 9월이다.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서울에 오면서 의궤 한 권을 들고 왔다. 두 권으로 된 책 가운데 한 권이었다. 마침 한국은 고속철도 사업자를 고르던 참이었다.
파리 국립도서관의 보존 담당자들은 이 일에 강하게 반발했다. 공공의 소장품은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다는 원칙을 들어, 문화장관에게 항의 서한까지 보냈다. 한국에서 보면 야속한 일이지만, 나는 그들이 밉지 않다. 그들 역시 자기가 맡은 목록을 지키려던 사람들이었다. 장부를 지키는 사람들은 어느 나라에나 있고, 그들은 대개 옳은 말을 하면서 남을 곤란하게 만든다.
수백 년 된 왕실 기록이 외교 가방 속 견본품처럼 바다를 건넌 그해, 한국은 결국 프랑스의 고속철을 택했다. 나머지 의궤가 돌아오기까지는 그로부터 18년이 더 걸렸다.
2011년, 의궤는 마침내 돌아왔다. 다만 반환이 아니라 대여였고, 5년마다 갱신하는 형식이었다. 우리가 만든 기록이 우리에게 돌아오면서 '갱신'이라는 단어를 꼬리표처럼 달고 온 것이다. 이 단어를 잠시 기억해두자. 조금 뒤에 다시 만나게 된다.
서른세 명의 관객과 명패들
뤼미에르 선언 서명자 명단에서 비어 있던 창작자의 자리
1895년 12월 28일, 파리 카퓌신 대로에 있던 그랑카페 지하에서 뤼미에르 형제가 처음으로 돈을 받고 영화를 틀었다. 그날 1프랑씩 내고 들어온 관객은 서른세 명이었다. 뤼미에르 집안 사람들은 이 발명에 별 미래가 없다고 여겼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예언은 보기 좋게 틀렸다. 그리고 백삼십 년 뒤, 그 이름을 딴 선언이 나왔다.
2026년 9월, 프랑스 남부의 작은 언덕 마을 생폴드방스에서 한국과 프랑스가 공동의장국으로 뤼미에르 서밋을 열었다. 쉰여덟 개 나라가 모였고, 영화와 영상의 미래에 관한 선언이 채택됐다. 오래전 갑판 위에서 만났던 두 나라가 이번에는 같은 쪽에 앉은 것이다.
나는 선언문 본문보다 서명자 명단을 더 오래 들여다봤다. 명단이란 한 나라의 문화사를 가장 정직하게 요약한 문서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쪽 명단은 보마르셰의 식탁에 놓였던 좌석표를 이어 쓴 것처럼 보였다. 극작가와 영화감독의 단체 SACD, 음악 작가들의 SACEM, 배우와 연주자들의 ADAMI, 그리고 세계 저작권 단체들의 연맹 CISAC이 있었다. 한국 쪽 명단은 어딘가 산업박람회의 부스 배치도를 닮아 있었다. 공공기관과 영화제, 그리고 이름만 들어도 아는 대기업과 플랫폼들이었다.
창작자의 이름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개인 자격 서명자 명단에 한국 감독 한 사람의 이름이 조용히 올라 있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이름과 한 제도의 이름은 무게가 다르다. 누구를 탓할 일은 아니다. 우리가 서명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 테이블에 한국 영상창작자 단체의 명패를 놓을 자리가 애초에 없었던 것이다. 식탁은 누군가 차려야 생긴다. 보마르셰가 그걸 가르쳐줬다.
배우들이 먼저 도착했다
프랑스에서도 한국에서도, 권리의 길을 먼저 연 것은 배우였다
명단 속 ADAMI는 1955년에 태어났다. 프랑스가 배우와 연주자의 권리를 법으로 온전히 명문화한 것은 1985년인데, 그 법의 날짜는 7월 3일이다. 보마르셰가 극작가들을 저녁식사에 부른 날로부터 정확히 이백팔 년 뒤의 같은 날이다. 역사는 가끔 지나치게 각본을 잘 쓴다. 감독으로서는 약간 질투가 날 정도다.
이 길에서는 어디서나 배우들이 먼저 도착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방송 실연자들은 재방송의 몫을 돌려받는 통로를 먼저 열었고, 내 첫 번째 통장이 가끔 기척을 내는 것도 그 덕분이다.
그렇다면 감독의 통장은 왜 이 나라 안에서 고요할까. 이 질문 앞에서 나는 먼저 내 무지부터 고백해야 한다.
보이지 않던 사무국
두 나라 감독을 갈라놓은 것은 국민성이 아니라 조문 한 줄이었다
2000년대 초, 나는 파리에 살았다. 그 무렵 내 첫 장편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가 프랑스에서 개봉했고, DVD로도 배급됐다. 나는 그 사실을 기쁜 소식으로만 알았다.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는 상상해본 적도 없다. 보마르셰의 식탁에서 시작된 사무국이 같은 도시에서 이백 년 넘게 작가들의 장부를 따지고 있었는데도.
권리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실재하는 수백 년의 조직도 보이지 않는다. 투명했던 것은 그들이 아니라 나의 눈이었다.
더 아픈 것은 그다음이다. 그곳의 영화인들도 내게 묻지 않았다. 그들에게 권리의 세계는 공기처럼 당연한 것이었고, 그래서 먼 나라에서 온 감독이 그 공기를 모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떠올리지 못했다. 모르는 사람은 물을 줄을 모르고, 아는 사람은 물을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무지는 그렇게 양쪽의 예의 바른 침묵 속에서 오래 살아남는다.
그 침묵이 깨진 것은 스무 해 가까이 지나서였다. 2020년, 한국영화감독조합이 처음으로 해외 단체와 계약서를 썼다. 상대는 SACD였다. 뒤이어 여러 나라의 단체들과 차례로 계약서를 주고받았지만, 처음은 늘 하나다. 한국 감독들의 통장에 처음 찍힌 입금자명을 나는 잊지 못한다. 보마르셰의 식탁에서 이백사십삼 년을 걸어온 이름이었다.
내가 그들을 보지 못하던 시절에도 그 식탁은 거기 있었다. 우리는 다만 거기 앉는 법을 몰랐고, 그들은 우리가 이미 앉아 있다고 여겼다.
그렇다면 왜 이 나라 안에서는 여전히 조용할까. 흔한 대답은 이렇다. 프랑스는 원래 예술가를 존중하는 나라니까. 이 설명은 편리하지만 게으르다. 두 나라의 법조문을 나란히 놓아보면 전혀 다른 그림이 나온다.
프랑스 법도 영상저작물에 대해서는 감독과 작가의 권리가 제작자에게 넘어간 것으로 추정한다. 파리의 사서들이 의궤를 두고 거부했던 바로 그 단어, 양도다. 출발선은 우리 저작권법 제100조와 거의 같다. 차이는 그다음 한 줄에 있다. 프랑스 법은 그 양도에, 작품이 쓰이는 방식마다 수익에 비례한 보상을 반드시 붙였다. 우리 법에는 그 한 줄이 없다.
두 나라의 감독을 갈라놓은 것은 국민성도, 와인도, 오래된 문화적 자부심도 아니었다. 조문 한 줄이었다. 다행히 문장 고치기는 감독들이 평생 제일 많이 해온 일이다.
갱신에 관하여
창작의 갱신을 위해, 이 나라의 테이블에 놓여야 할 명패
뤼미에르 선언 제9항에는 짧고 단단한 문장이 하나 있다. 창작이 정당하게 보상받지 못하면 갱신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 단어를 다시 만난다. 갱신. 의궤는 5년마다 갱신되는 조건으로 돌아왔다. 창작자에게 갱신은 조금 다른 뜻이다. 다음 작품을 쓸 시간이고, 그 시간을 버틸 생활이다. 한 편의 영화가 세상에 오래 남아 계속 쓰이는데 만든 사람에게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으면, 작품은 살아 있어도 그 작가의 다음 작품은 태어나지 못할 수 있다. 문화란 결국 누군가의 다음 작품이 태어나는 일의 연속이다.
그래서 올해 한국의 창작자들은 오랜만에 한 테이블에 앉았다. 배우와 방송작가, 독립 PD, 시나리오 작가, 독립영화인, 그리고 영화감독이. 'K-콘텐츠의 정당한 보상을 위한 창작자연대'라는, 이름만큼은 조금 길고 성실한 테이블이다. 그 테이블에서 나온 첫 문장은 9월, 저작권법 개정안의 모양으로 국회에 올라갔다. 메뉴는 이번에도 기록되지 않겠지만, 안건은 이백오십 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함께 앉을 것. 그리고 먼저 장부를 볼 것.
세계의 관객은 이미 한국의 창작자를 발견했다. 바다 건너의 오래된 사무국도 우리를 찾아냈다. 남은 것은 이 나라의 테이블이다. 그 자리에 기관과 기업과 플랫폼의 명패 옆으로, 배우와 감독과 작가의 명패가 나란히 놓이는 날이 오면 좋겠다.
그날 나의 두 번째 통장은 처음으로 이 나라 말로 된 입금자명을 보여줄 것이다. 알림이 오면 누구보다 먼저 보마르셰에게 알리고 싶다. 물론 금액보다 정산 내역을 먼저 확인한 뒤에.
- 1BnF 갈리카, 코메디프랑세즈 공연 기록. 「세비야의 이발사」 초연(1775.2.23)과 4막 수정판 재공연(1775.2.26)
- 2Beaumarchais, 『Lettre modérée sur la chute et la critique du Barbier de Séville』(1775)
- 3보마르셰와 코메디프랑세즈의 정산 분쟁(1777.1.3, 4,506리브르) 및 'tomber dans les règles' 관행에 관한 연구 (hal.univ-reunion.fr/hal-02403803)
- 4SACD 연혁. 1777년 7월 3일 만찬과 극작 입법 사무국(Bureau de législation dramatique) 설립
- 5Décret des 13-19 janvier 1791 relatif aux spectacles (공연의 자유와 작가의 공연권)
- 6Loi n° 85-660 du 3 juillet 1985, 이른바 '랑 법' (저작권 및 저작인접권에 관한 법률)
- 7Beaumarchais, 『La Folle Journée, ou le Mariage de Figaro』(1784), 5막 3장 피가로의 독백
- 8「영화와 영상의 미래에 관한 뤼미에르 선언」(2026.9.7), lumieresummit.org
- 9ADAMI 연혁 (1955년 설립)
- 10프랑스 지식재산법 L.132-24, L.132-25
- 11한국 저작권법 제100조
- 12저작권법 일부개정법률안 (임오경 의원 대표발의, 2026.9.17)

민규동 Min Kyu-dong
영화감독 · 한국영화감독조합 대표
한국영화감독조합 대표이자 한국방송실연자권리협회 회원. 두 개의 통장을 갖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