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96 · OCTOBER 2026 한국방송실연자권리협회 웹진
연한 하늘색 배경 앞에서 회색 집업 재킷에 청바지를 입고 걸터앉아 한쪽을 응시하는 배우 박정민
sem company
cover · The Performer

긴장과 여유 사이를 오가는 배우 박정민

읽히지 않는
얼굴

Prologue

잔뜩 화가 난 걸까? 내심 기쁜 걸까? 말을 고르고 있나? 침묵하기로 했나? 불퉁하게 다문 입술, 강렬한 눈빛, 거칠게 뻗어 올라간 성근 눈썹……. 저이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투명하게 읽어내기 어려운, 다소 퉁명스러운 인상의 배우 박정민. 그런 그가 제46회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가수 화사와 함께 만들어낸 무대의 한 장면을 상기해본다. 느긋하게 뒷짐을 지고서 그녀의 호소를 묵묵히 받을 때, 눈썹을 꿈틀할 때, 슬며시 미소지을 때, 박정민이 발산한 희한한 여유로움, 그 독특한 매력은 많은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글 하나THE TENSION OF OPPOSING FORCES

길항 작용 속에서 박정민이 만들어내는 긴장감

《파수꾼》 《동주》 《전,란》

박정민은 로맨틱코미디나 멜로드라마 속 멋진 연애 상대도, 남성들이 힘과 세를 과시하는 느와르의 일원도 아닌 독립영화에서 처음 존재감을 드러냈다. 윤성현 감독의 데뷔작 《파수꾼》에서 ‘희준’ 역할로 출연한 박정민은 위태로운 ‘기태’(이제훈)에게 구애 아닌 구애와 학교 폭력을 당하는 역할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기태에게 휘둘리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희준은 기태가 혹독한 폭력을 휘둘러도, 돌변하여 우정과 애정을 구걸해도, 그저 꼿꼿이 서 있는다. 눈 하나 깜짝이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로 어떤 반응도, 그 무엇도 내어주지 않는다. 이미 희준은 기태와 절연했고 실망을 번복할 생각이 없으며, 그런 상대에겐 눈물 한 방울도 솔직한 말 한마디도 내놓을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희준의 마음을 닫은 두 눈을 보면, 아무리 기태가 위세를 과시해봐야 결국 이 관계의 주도권은 희준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박정민은 바로 이런 긴장감을 만드는 배우다. 상대 배우와의 합 속에서 기막힌 리액션을 찾아내는 배우. 그리고 어떤 빛나는 상대역 앞에서도 자기만의 것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배우.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에서 ‘동주’(강하늘)와 대비되는 사촌이자 친구 ‘몽규’로 출연했을 때의 그를 떠올려본다. “너는 시를 계속 쓰라. 총은 내가 들 거니까.”라고 말하는 몽규는 한때 동주처럼 글을 쓰고자 했으나 문학청년으로서의 꿈보다 일제의 폭압에 맞서 싸우는 게 우선인 사람이다. 동시에 자신은 총을 들지언정, 빼어난 글재주를 지닌 유약한 동주만큼은 지켜주고 싶은 사람이다. 박정민은 송몽규의 강건함을 능청스러운 방식으로 선보였으며, 클라이맥스에 다다라선 용암을 토해내듯 발산적인 연기를 선보였다. 그건 윤동주를 연기한 배우 강하늘의 섬세한 아름다움과 맞붙어 서로를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연기였다. 영화 《전,란》에서는 찬영(강동원)의 친우이자 원수, 종려로서 등장했을 때도 그는 뜨거운 의적 찬영의 반대항으로서 단단히 자리를 지켰다. 상대 배역과의 길항 작용 속에서, 투-핸더 무비에서 그는 단연 빛나는 배우다.

상대 배우와의 합 속에서 기막힌 리액션을 찾아내는 배우.
그리고 어떤 빛나는 상대역 앞에서도 자기만의 것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배우.
둥근 안경을 쓰고 음료와 휴대폰을 든 채 화면을 골똘히 들여다보는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 속 진태(박정민)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 속 피아니스트 진태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
글 둘THE FLAVOR OF CHARACTER

캐릭터 연기의 맛

《그것만이 내 세상》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박정민은 배우 이병헌과 연기한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에서 박정민은 앙상블 연기를 넘어서, 한층 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펼친다. 서번트 증후군의 천재 피아니스트이자 조하(이병헌)의 이복동생 진태가 된 그는 배역을 극사실적이고도 천진하게 표현했다. 피아노를 칠 줄 전혀 몰랐던 박정민은 훈련을 거듭해 대역 없이 모든 연주 신을 직접 소화하며 핸드싱크를 맞췄고, 음악을 한없이 즐기고 사랑하는 순수한 자폐인의 모습을 보여줬다. 이병헌과 윤여정이라는 쟁쟁한 선배 배우들 사이에서 캐릭터 연기를 맡은 박정민은 어디로 튈지 모르겠는 그만의 페이스대로 극을 이끌어갔다. 캐릭터 연기를 제대로 해내는 배우라는 건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에서도 입증됐다. 트랜스젠더 여성 ‘유이’를 맡은 박정민은 이정재와 황정민이라는 극에 치닫는 두 마초적 인물 사이에서 입체적인 연기로 생동하며 극에 숨결을 불어 넣었다.

배우로서 박정민의 또 다른 빼어난 점은 이러한 유연성이다. 그의 여유는 가벼워지려면 얼마든지 가벼워질 수 있다. 박정민은 영화 《변산》, 《시동》, 《1승》에서는 특유의 여유를 한껏 부려놓으며 양아치와 한량 사이를 오가는 코믹한 연기를 선보였고, 《밀수》에선 상도덕도 뭣도 없는 악당 ‘장도리’ 역할을 맡아 지질하고 촌스럽고 범속한 건달을 선보였다. 김혜수, 염정아라는 난다긴다하는 여성 배우들의 안타고니스트로서 ‘형편없는 남자’가 되어 때론 코믹하게 때론 분노가 지끈 차오르게 한 건 물론이다. 농담과 진담 사이, 알 수 없는 여유를 가진 박정민이 영화 《하얼빈》에서 유머를 잃지 않는 독립운동가가 된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검은 터틀넥을 입고 옅은 배경 앞에서 옆얼굴로 한곳을 응시하는 영화 《휴민트》 속 박건(박정민)
영화 《휴민트》 속 박건영화 《휴민트》
글 셋BRUTALITY AND LOVE

지독한 브루탈리즘과 징글맞은 사랑

《사바하》 《휴민트》 《헤어질 결심》

박정민이 가벼워질 수 있다는 건 끝도 없이 무거워질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하드보일드한 배역도 제 옷처럼 입는 박정민은 지독하고 혹독한 곤경에 처하는, ‘브루탈’한 얼굴을 훌륭하게 보여주는 배우다. 영화 《사바하》는 부르트고 까지고 피투성이가 된 살풍경한 그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작품으로, 신흥 종교단체의 일원으로서 알 수 없고 건조한 낯으로 내내 자신의 일을 수행하다가 마침내 드러난 진실 앞에서 무너져 내린다.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어머니를 구하려 아버지를 살해해 소년원에 수감되고, 아버지를 대리하던 존재에게 속아 갖은 악행을 저지르던 고단한 삶의 끝에서, 박정민은 황폐해진 내면을 자신의 얼굴로서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의 하드보일드한 얼굴에 대해서라면, 가장 최근작인 《휴민트》에서 보여준 북한 보위성 소속 박건의 얼굴에 대해서도 언급해야만 한다. 말 없고 고독하고 방어적이지만 사랑에서만큼은 죽음도 불사하는, 그 남자에 대하여. 박정민은 특유의 불퉁함을 멜로적 기표로 활용했고, 바늘 하나 들어갈 자리도 없을 것 같은 그 하드보일드함은 끝내 사랑의 뜨거운 충정이자 증표가 된다. 박정민과 멜로. 갖은 장르를 횡단하며 활약한 배우임에도 자주 본 조합은 아니다. 박정민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사랑하는 남자’를 본격적으로 연기한 건 《헤어질 결심》 때다. 칼자루를 쥐고 형사(박해일)와 대치하다 사랑하는 여자(정하담)를 보고 “나 너 때문에 고생깨나 했지만 사실 너 아니었으면 내 인생 공허했다.”라 외치며 옥상에서 떨어진 ‘홍산오’의 경우. 영화 전체에서 비중은 작았지만 사랑을 위해 몸을 던지는 미친 남자의 얼굴은 잊지 못할 것이었다. 그가 상대 배역과의 사이에서 만들어내던 팽팽한 긴장이 사랑이란 감정으로 쏟아질 때, 그것이 얼마나 강력해질 수 있는지를 먼저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사진이 잔뜩 붙은 어두운 방 안에서 올리브색 재킷을 입고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영화 《얼굴》 속 동환(박정민)
영화 《얼굴》 속 동환영화 《얼굴》
글 넷SHOWN YET HIDDEN

보여주되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 《얼굴》

마침내, 박정민의 많은 얼굴들을 경유해 그의 얼굴을 가장 극적으로 사용한 영화 《얼굴》에 대해서 이야기할 차례가 왔다. 《얼굴》에서 박정민은 1인 2역을 맡아 시각장애인이자 도장 장인인 아버지 영규의 젊은 시절과 아버지를 도와 공방을 운영하며 어머니의 죽음의 미스터리를 파헤치는 아들 동환 역할을 맡았다. 뿌옇고 불투명한 두 눈, 너절한 옷차림새에 제대로 씻지도 못한 듯한 얼굴, 더듬더듬 짚어 상황을 파악하는 두 손과 주저하는 두 발. 영규는 어렵고 곤궁한 상황 속 도장 기술로 자신을 지탱해 장인이 된 인물이지만, 그 이면엔 다른 것이 있다. 얼굴을 보지도 못한 채 예쁘다는 말에 사랑했고, 여전히 얼굴을 보지도 못한 채 모든 게 거짓말이며 실은 추녀라는 남들의 말에 증오하게 된 아내에 대한 비밀. 배우 박정민은 약자끼리 묶이는 수치심, 더 밑으로 떨어질 수 없다는 절박함, 같은 약자를 사지로 밀어버리는 약자의 알량한 자존심과 경멸과 분노를 어떤 것도 투과되지 않는 얼굴로 표현했다. 진실을 알아내고도 덮기로 한 아들 동환 역시도, 눈을 뜨고 있지만 아버지와 다름없는 존재다. 박정민은 1인 2역을 오가며 추악한 인간의 본성을 살풍경하게 드러낸다. 그 특유의 퉁명스러운, 좀처럼 속내가 읽히지 않는,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듯한 얼굴로 말이다.

Epilogue

힘과 긴장 그리고 능청과 여유를 지닌 배우 박정민의 얼굴. 그의 개성 있는 마스크와 상대를 자기 쪽으로 당겨오는 악력은 귀한 재능이다. 배우로서 활약하는 동시에 작가이자 다독가로서, 출판사 대표로서, 게임 방송 스트리머로서, 타 장르의 예술부터 서브컬처까지 자유롭게 넘나드는 박정민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장르와 캐릭터를 자유롭게 누비는 그의 유연성과 사람들을 잡아끄는 내면의 힘이 어디서 연유한 것인지 알 것만 같다.

Writer
필자 이예지

이예지 Lee Ye-ji

문화 칼럼니스트

〈코스모폴리탄〉〈GQ〉〈씨네21〉 등에서 기자 및 에디터로 일하며 대중문화, 영화, 문학, 미술에 대한 글을 썼고 그중에서도 인물론을 중점적으로 써왔다. 저서로 산문집 《질투 수련》과 인터뷰집 《여자가 사랑한 여자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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