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추얼 퍼포머의 부상
광고에서 드라마, 아이돌, 그리고 밈까지
최근 콘텐츠 산업은 급격한 전환기를 맞고 있다. AI 기술의 발전은 단순한 제작 보조의 수준을 넘어 인간의 얼굴과 목소리, 감정 표현까지 구현 가능한 단계에 이르렀다. 실제 배우의 외형을 학습한 버추얼 휴먼은 이미 광고와 드라마 영역에 등장한 지 오래이며, 몇 년 전 배우 윤여정의 젊은 시절 모습을 복원한 딥페이크 광고는 기술의 현실감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꾸준한 활동을 이어 온 가상 인플루언서 로지 역시 광고, 브랜드 협업, SNS 활동을 통해 경제적 파급력을 입증해 왔다. 특히 티빙(TVING) 오리지널 드라마 《내과 박원장》에 카메오로 출연하며 단순한 인플루언서를 넘어 만능 엔터테이너로서의 가능성을 현실화했다.
버추얼 아이돌 영역에서도 그 변화는 가속화되고 있다. 버추얼 그룹 플레이브(PLAVE)는 실시간 라이브 방송, 콘서트, 팬미팅 등을 수행하며 기존 아이돌 산업의 문법 안으로 자연스럽게 진입했다. 국내에서 쌓은 인기는 해외 무대로까지 확장되었다. 네 번째 미니앨범 《Caligo Pt.2》가 빌보드 200에 진입하며 [1] , 버추얼 아이돌의 인기가 더 이상 국내 시장에 한정된 현상이 아님을 입증했다. 이제 기술은 ‘가상의 캐릭터’를 창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 연예인의 활동 구조 자체를 모사하고 나아가 그것을 재구성하는 단계에까지 도달하고 있다.
AI 기술의 영향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하향식 생산 영역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향유자의 소비문화 안으로도 빠르게 침투하고 있다. 생산과 수용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는 것이다. 최근 SNS에서 화제가 된 ‘야구장 여신’ 밈은 AI 영상 기술이 단순한 실험의 단계를 지나 밈 문화와 결합하며 대중적 콘텐츠 소비 영역으로 확장되었음을 보여 준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소비되고, 사람들은 그 허구적 존재에 감정을 이입하며 놀이와 담론을 형성한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기술 혁신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문제는 기술적 대체의 가능성 그 자체에만 있지 않다. 기존의 인간 연기자들이 담당해 온 영역이 앞으로 어떻게 재편될 것인지, 그리고 그 안에서 인간은 어떠한 방식으로 생존하고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증명해 나갈 수 있을 것인지—우리는 지금 그 근본적인 질문 앞에 서 있다.
버추얼 퍼포머는 ‘실험’에서 ‘산업’으로 진입했다. 생산은 물론, 향유자의 일상적 소비문화 안으로도 침투하면서 인간 연기자의 영역 재편 논의를 불가피한 의제로 만들고 있다.

버추얼 퍼포머와 인간 연기자의 본질적 거리
로고스와 뮈토스, 두 가지 분석의 준거
버추얼 퍼포머와 인간 연기자의 역량을 비교하기에 앞서, 이 글은 두 가지 고전적 인식의 틀을 분석의 준거로 삼고자 한다. 바로 로고스(Logos)와 뮈토스(Mythos)다. 로고스가 논리와 이성, 측정 가능한 기술적 역량을 지시한다면, 뮈토스는 서사와 감정, 체화된 경험의 영역을 가리킨다. 이 두 축은 단순한 철학적 수사가 아니라 오늘날 연기자의 역량을 실질적으로 구분하는 분석 틀로서 기능할 수 있다.
버추얼 퍼포머와 인간 연기자의 기술적 역량
인간 연기자의 기술적 역량은 로고스의 층위에서 평가될 수 있다. 발성과 호흡의 조절, 신체 언어의 정밀한 운용, 대사 처리의 리듬감—이 모든 것은 수련과 반복을 통해 습득되는 어느 정도 측정 가능하고 훈련될 수 있는 역량이다. 이 지점에서 버추얼 퍼포머와 인간은 공통의 기반을 공유한다. 이 둘은 모두 퍼포먼스의 외형적 완성도를 구현하는 기술적 주체로서 기능할 수 있다.
로고스의 관점에서 버추얼 퍼포머의 역량은 이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다. 표정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을 포착해 재현하는 ‘페이셜 모션 캡처’, 특정 인물의 음색과 억양을 학습해 발화를 생성하는 ‘보이스 클로닝’, 그리고 맥락에 따라 감정적 뉘앙스를 조절하는 ‘자연어 처리 기술’은 이미 상용화 단계에 접어들었다. 한 배우의 젊은 시절을 복원한 딥페이크 광고나실존 배우의 외형과 음성을 학습한 AI 휴먼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사례는 AI 기술이 단순한 ‘모사’의 수준을 넘어 인간 존재를 ‘재현’하는 단계로 이행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로고스의 층위에서 AI가 인간을 압도하는 영역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피로하지 않은 것, 오차를 최소화하는 것, 그리고 대규모 데이터를 기반으로 특정 퍼포먼스의 ‘최적값’을 도출할 수 있다는 것을 들 수 있겠다. AI는 감정의 기복 없이 동일한 수준의 수행을 무한으로 반복할 수 있으며수백만 건의 인간 연기 데이터를 분석해 특정 장르나 맥락에 최적화된 표현을 산출할 수 있다. 이는 효율성과 재현성이라는 산업적 논리 안에서 AI가 갖는 명백한 우위 지점이다.
외형적 완성도와 산업적 효율성은 더 이상 인간의 독점 영역이 아니다. 측정 가능한 모든 지표에서 AI는 임계점을 넘어섰다. 인간 연기자의 차별성은 이 층위 바깥에서 정의되어야 한다.
버추얼 퍼포머가 모방할 수 없는 인간 내면의 지도
인간의 퍼포먼스에는 통제되지 않은 미세한 떨림, 예측 불가능한 즉흥성, 그날의 신체 상태와 감정이 스며든 질감이 존재한다. 이 ‘매력’은 ‘오류’가 아니라오히려 관객이 감지하고 반응하는 살아 있음의 신호다. 그 신호는 이중으로 작동한다. 첫째는 지각적 측면이다. 인간 배우의 목소리 떨림이나 움직임의 미세한 흔들림이 설명하기 전에 관객의 신체에 닿는다. 둘째는 존재론적 측면이다. 관객은 저 불완전함이 살아 있는 몸에서 왔다는 것을 알고, 그 앎이 지각에 깊이를 더한다. 기술이 동일한 떨림을 완벽하게 재현하더라도 그것이 매력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매력은 파형을 넘어 인간 캐릭터의 출처에 깃들기 때문이다.
이는 뮈토스의 영역이다. 로고스가 퍼포먼스의 외형적 완성도를 묻는다면 뮈토스는 그 수행의 내부를 묻는다. 무엇이 이 퍼포먼스를 가능하게 했는가. 어디에서 이 감정은 왔는가. 뮈토스는 신화와 서사의 언어로, 인간이 세계를 의미화하고 감정을 조직하는 방식 자체를 가리킨다. 그리고 바로 이 층위에서 버추얼 퍼포머와 인간 연기자 사이의 간극은 선명해진다.
버추얼 퍼포머와 인간 연기자는 모두 특정 페르소나를 수행한다는 점에서 표면적으로 유사해 보인다. 그러나 인간 연기자는 페르소나의 층위 아래에자신이 오랜 시간 정립해 온 연기 철학과 살아온 경험을 통해 형성된 또 하나의 정체성을 품고 있다. 이는 역할을 ‘맡은’ 플레이어로서의 자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그 역할을 선택하고 해석하는 주체로서의 퍼슨(person)이다.
기술은 페르소나를 정교하게 모사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 연기자는 자신이 세운 철학적 원칙과 축적된 감각적 경험을 토대로마음 깊은 곳에 새겨진 감정의 지도를 길어 올린다. 그 지도는 단순한 정보나 패턴이 아니라삶의 맥락 속에서 체화된 것이다. 바로 이 체화된 내면의 역량이 버추얼 퍼포머의 수행과 인간 연기 사이에 존재하는 본질적 간극을 만들어 낸다.
바로 여기에 뮈토스의 핵심이 있다. 인간 연기자의 퍼포먼스가 관객에게 닿는 것은 잘 만들어진 감정의 ‘출력값’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 수행 안에 한 인간이 세계와 맺어 온 관계의 역사, 고통과 기쁨이 교차한 시간의 밀도, 그리고 그로부터 형성된 감정의 지도가 담긴 스토리텔링이다. 관객은 연기자가 부단히 쌓아 온 스토리텔링을 직감적으로 감지하면서 경험한다. 연기자와 관객 사이에 드러나는 감정적인 기류, 그 느낌의 정체가 바로 뮈토스다.
미래에는 기술이 연기자의 감정을 완벽하게 묘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감정을 체화할 수는 없다. 버추얼 퍼포머가 재현하는 슬픔과 한 배우가 자신의 삶에서 길어 올린 슬픔 사이에는—설령 그 외형이 동일해 보일지라도—본질적인 거리가 존재한다. 그 거리를 만드는 것이 뮈토스이며, 그것이 인간 연기자가 기술의 시대에도 여전히 대체 불가능한 이유다.
뮈토스는 묘사의 문제가 아니라 출처의 문제다. 기술은 감정을 묘사 할 수 있지만 체화 할 수는 없다. 인간 연기자의 대체 불가능성은 바로 이 거리에서 발생한다.
맺으며
효율의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것
이 지점에서 하나의 비유가 떠오른다. 비행기라는 이동 수단이 존재함에도 인간은 왜 두 발로 장거리의 킬로미터를 달리고, 맨손으로 바벨을 들어 올리며 한계를 시험하는가. 이것들은 효율의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는 질문이다. 비행기는 마라토너보다 빠르고, 기계는 역도 선수보다 더 무거운 것을 든다. 그러나 우리는 기계의 수행에 눈물 흘리지 않는다.
운동선수가 바벨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는 순간, 우리가 감동 받는 것은 그 무게 때문이 아니다. 땀과 고통, 오랜 수련과 실패의 역사가 그 한 동작 안에 압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퍼포먼스는 단순한 수행을 넘어 숭고함의 차원에 닿는다. 그리고 인간이 만들어 낸 위대한 스토리텔링은 관객과의 감정적 터치를 만들어 낸다. 인간이 수행하기 때문에 위대하고, 인간이 실천하기 때문에 아름답다.
연기 역시 다르지 않다. AI가 ‘최적화된’ 감정 표현을 산출할 수 있어도관객이 인간 연기자에게서 느끼는 전율은 그 수행이 한 인간의 삶과 몸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에서 온다. 알려주지 않아도 그 감정의 깊이를 향유자는 느낄 수 있다.
- 1플레이브(PLAVE) 미니앨범 《Caligo Pt.2》 빌보드 200 진입 관련 보도. JTBC 뉴스, https://news.jtbc.co.kr/article/NB12296326
- 로고스Logos
- 논리·이성·측정 가능한 기술적 역량의 축. 발성과 호흡, 신체 언어, 대사 리듬처럼 수련으로 습득되고 데이터로 환원되는 영역 이다. 이 층위에서는 AI도 인간과 공통의 기반을 공유하며, 효율성과 재현성에서는 오히려 인간을 압도하기도 한다.
- 뮈토스Mythos
- 서사·감정·체화된 경험의 축. 한 사람이 살아온 시간이 만들어 낸 ‘감정의 지도’ 에서 길어 올려진다. 기술이 외형을 완벽히 재현하더라도 모방할 수 없는, 인간 연기자를 대체 불가능하게 만드는 고유의 영역이다.
- 버추얼 퍼포머Virtual Performer
- AI·CG로 구현된 가상의 연기자. 페이셜 모션 캡처와 보이스 클로닝 등으로 인간의 외형과 음성을 재현하며, 광고·드라마·아이돌 영역에서 이미 인간 연예인의 활동 구조를 모사하는 단계 에 도달했다.

오윤지 Oh Yun-ji
가톨릭대학교 예술미디어융합학과 교육전담 초빙교수
K-pop 팬덤 연구자이다. 한양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에서 'K-pop 팬덤 콘텐츠 생성 구조 연구' 논문으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Meiji University(明治大学) 초청 학자로 글로벌 팬덤 연구를 수행하였으며, 현재 (사)한국애니메이션학회 이사, 한국국악교육학회 이사, 문화콘텐츠전략연구소 운영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다수의 팬덤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저서로는 『아이돌 팬덤』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