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의 창작성
8분의 연기, 짧지만 잊히지 않는 장면 앞에서
1998년 주디 덴치는 영화 〈셰익스피어 인 러브〉에서 단 8분간 엘리자베스 1세를 연기하고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1976년 비어트리스 스트레이트는 〈네트워크〉에서 6분의 연기로 같은 상을 수상하였고, 2008년 비올라 데이비스는 〈다우트〉의 한 장면만으로 같은 부문 후보에 올랐다. 이처럼 짧지만 잊혀지지 않는 장면 앞에서 자연스레 의문이 생긴다. 연기는 배우의 창작물인가? 아니면 감독의 지시대로 움직인 결과에 지나지 않는가?
휴즈가 던지는 질문은 바로 이 지점에 놓여 있다. 미국 저작권법상 배우는 영상저작물의 저작자(author)가 될 수 있는가. 휴즈의 결론은 분명하다. 그렇다.
일반적으로 배우는 영상저작물의 저작자로 여겨지지 않는다.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영상저작물의 저작자를 저작권법상 일정 범주로 규정하는 입법례(이를 ‘범주방법’이라 한다)를 보면, 그 범주는 대체로 시나리오작가, 영화감독, 간혹 영상제작자가 거론될 뿐이다.
그런데 휴즈는 그러한 사실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는 범주방법을 택한 대다수 대륙법계 국가가 배우를 저작자로 호명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의 연기에 창작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실연을 별도의 저작인접권으로 보호하는 길을 택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보호의 방식에 관한 입법적 선택이지, 창작성의 유무에 관한 사실 판단이 아니라는 것이다.
배우가 저작자로 불리지 않는 것은 연기에 창작성이 없어서가 아니다. 대륙법계가 실연을 별도의 저작인접권으로 보호하는 길을 택한 입법적 선택의 결과일 뿐이다.
사고실험: 유일하게 보호할 수 있는 요소로서 연기
두 가지 사고실험 ─ 레이 찰스, 그리고 텅 빈 무대
휴즈의 논증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대목은 두 가지의 사고실험이다.
먼저 음악이다. 〈America the Beautiful〉은 작곡·작사 모두 권리가 만료된 공유저작물이다. 레이 찰스가 반주 없이 피아노를 치며 스네어 드럼 하나만 곁들여 이 곡을 부른 녹음을 상상해 보자. 음향 편집도 최소화한다. 이 녹음에 담긴 창작성은 거의 전적으로 레이 찰스의 것이다. 미국 1976년 저작권법 입법자료는 “실연이 그 저작물에서 유일하게 보호할 수 있는 요소인 경우”가 있을 수 있음을 명시한다. 이때 보호되는 음반은 사실상 그 실연 자체다.
이제 영상으로 옮겨 보자. 모건 프리먼이나 이안 맥켈런이 텅 빈 무대에서, 자신이 직접 켠 카메라 앞에서 셰익스피어의 독백을 연기한다. 감독도 촬영감독도 미술감독도 없고 각본은 공유저작물이다. 이 영상에는 저작권이 존재하는가? 배우의 연기가 “최소한의 창작성”(modicum of creativity)을 갖추었으므로 이 영상에 대하여서는 당연히 저작권이 성립할 수 있다. 여기에 각본가·촬영감독·조명·감독을 차례로 더한다고 하여, 배우의 독창적 표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홈스 미 대법관의 오래된 명제는 휴즈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개성은 늘 무언가 고유한 것을 담는다. 그것은 필체에서조차 드러난다.” 필체마저 창작으로 인정하면서 연기는 창작이 아니라고 말하려면, 배우를 ‘줄에 매달린 꼭두각시’로 보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줄에 매달린 꼭두각시’ 이론의 오류
즉흥과 애드리브, 배우가 텍스트를 바꾸는 순간
배우의 저작자성을 부정하기 위하여서는 배우가 ‘줄에 매달린 꼭두각시(puppets on strings)’라는 점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배우가 단지 각본을 읊는 존재라는 시각은 실제와 어긋난다. 즉흥 연기가 대표적인 증거이다. 휴즈는 〈카사블랑카〉의 “Here’s looking at you, kid”, 〈택시 드라이버〉의 “You talkin’ to me?” 장면, 〈지옥의 묵시록〉에서 말런 브랜도가 커츠 대령으로 풀어낸 18분의 대사, 〈좋은 친구들〉의 “What do you mean funny?” 장면이 모두 배우의 즉흥에서 나와 최종본에 남았으며, 심지어 〈토르: 라그나로크〉의 감독은 영화의 80%가 즉흥이라 말했다고 소개하였다. 한국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흔하다. 〈신세계〉의 ‘드루와’, 〈범죄도시〉의 ‘아직 싱글이야’, 〈내부자들〉의 ‘모히또에서 몰디브 한잔’은 모두 배우의 애드리브로 알려져 있다.
배우가 각본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흔하다. 휴즈는 연극 〈언더스터디〉에 출연한 배우 매튜 서스먼의 아래 발언을 인용하여 그 관계를 설명한다.
특정한 목소리의 특성과 신체적 제스처는 텍스트의 일부가 된다. 〈언더스터디〉에게는 두 개의 텍스트가 존재한다. 하나는 글로 쓴 말, 즉 대본이고, 다른 하나는 배우들이 매일 밤 무대에서 수행하는 공연 텍스트이다.
공연 텍스트는 대본 위에 겹쳐 둔 투명 필름과 같다. 배우의 개성과 인물에 접근하는 방식, 다른 배우들 및 연출가와의 협업을 통해 희극적 또는 극적 박자가 형성된다.
수천 명의 저작권
엑스트라까지 권리를 주장하는 혼란이 올까
배우의 연기를 창작으로 인정한다면 배우의 저작자성을 인정하여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배우의 저작자성을 인정하면 단역·엑스트라까지 수천 명이 저작권을 주장하는 혼란이 오지 않을까? 휴즈는 이를 “플로리다 남부에 눈이 올까 걱정하는 일”에 비유한다. 대비는 해둘 수 있으나, 실제로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혼란을 막는 견고한 여과장치가 이미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최소기준을 넘는 독창적 표현 요건이 보조 인력과 군중 속 엑스트라를 걸러낸다. 둘째, 노조가 촘촘히 조직된 산업에서 업무상저작물(work-for-hire) 법리와 계약 관행이 권리를 제작자에게 귀속시킨다. 셋째, 그래도 빈틈이 생기면 묵시적 이용허락이 배우의 기여부분에 자연스레 적용된다. 시대가 변하더라도 이러한 장치는 견고하리라는 것이 휴즈의 전망이다. 신생 사업이라 하여 최저임금법이나 환경기준에서 면제되지 않듯, 영상제작자라 해서 권리 처리의 책무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모든 여과장치가 실패하는 드문 경우, 배우는 비로소 공동저작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휴즈는 이또한 두려워할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공동저작이 곧 균등한 지분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 보통법상 지분공유(tenancy-in-common)는 기여도에 따른 불균등 지분을 허용한다. 기여도에 비례하는 작은 지분을 인정하면, 법원이 ‘부당한 횡재’를 우려하여 저작자성 자체를 부정해 버리는 왜곡도 사라지고, 제작자의 권리집중 유인도 훼손되지 않는다.
즉 휴즈의 결론은 간명하다. 배우는 미국 저작권법상 저작자가 될 수 있으며, 이와 상반된 결론은 타당하지 않다.
저작자성을 인정해도 ‘수천 명의 저작권’ 혼란은 오지 않는다. 독창성 요건·업무상저작물 법리·묵시적 이용허락이 여과장치로 작동하고, 공동저작도 기여도에 따른 불균등 지분으로 처리되기 때문이다.
우리 저작권법상 ‘저작자로서 배우’의 가능성
저작권법 제65조, 그리고 남은 과제
위 결론을 우리 저작권법에서 곧장 적용하기는 어렵다. 미국의 저작권 제도는 법상 실연자의 저작인접권을 규정하지 않는 데서 배우의 저작자성 논의가 비롯한 것이지만, 우리 저작권법은 실연자의 저작인접권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논의의 출발점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연자로서 저작인접권의 보호를 받는 배우가 동시에 저작권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지 여부는 별도로 검토해 볼만한 문제이다. 우리 저작권법 제65조는 저작인접권에 관한 규정이 저작권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아니 된다고 정하고 있다. 즉 배우의 창작성이 명백하게 저작물로써 표현되었다면, 실연에 대한 권리가 인정된다는 사실만으로 배우의 저작자 지위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각 사례마다 저작자로서 혹은 실연자로서 배우의 지위를 분별할 기준에 관한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저작인접권으로서 실연자의 권리를 인정하는 영국에서는 실연자(performer)의 저작자성(authorship)이 학술적으로 논의된 바 있는데, “텍스트가 남긴 여지가 넓을수록 연출가가 저작자가 될 가능성이 높고, 연출가가 독재적일수록 배우가 저작자가 될 가능성은 낮아진다”고 말한다. [1]
실연자로서 권리를 인정받는 문제와 별개로 배우의 저작자성이 인정된다면, 합성실연의 문제를 비롯하여 시청각실연자의 권리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다양한 현안에 대하여 새로운 관점에서 해결책을 모색해볼 수 있을 것이다. 저작자로서 배우에게는 시청각‘실연자’보다 더 많은 권리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우리 저작권법 제65조는 저작인접권 규정이 저작권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정한다. 실연자의 권리가 인정된다는 사실만으로 배우의 저작자 지위를 부정할 수는 없으며, 저작자성이 인정되면 합성실연 등 새로운 현안에 더 넓은 권리로 대응할 수 있다.
- 1실연자의 저작자성에 관한 영국의 논의로는 다음을 참조. Richard Arnold, Performers’ Rights, 5th ed., London: Sweet & Maxwell, 2015, pp.316–332.
- 저작인접권Neighbouring Rights
- 실연자·음반제작자·방송사업자에게 부여되는 권리. 저작권(authors’ rights)과 구별되며, 실연자에게는 공중송신권이 일괄 부여되지 않는 등 보호 범위가 상대적으로 제한적 이다. 우리 저작권법상 배우의 연기는 이 저작인접권으로 보호된다.
- 업무상저작물Work for Hire
- 고용·계약 관계에서 만들어진 저작물의 권리를 사용자(제작자)에게 귀속 시키는 법리. 노조와 계약 관행이 촘촘한 영상산업에서 ‘수천 명의 저작권’ 혼란을 막는 핵심 여과장치로 작동한다.
- 지분공유Tenancy in Common
- 미국 보통법상 공동저작의 지분 형태로, 기여도에 따른 불균등 지분을 허용 한다. 배우에게 기여도에 비례하는 작은 지분을 인정하면 저작자성 자체를 부정하는 왜곡 없이 권리관계를 조정할 수 있다.
조병한 Cho Byung-han
한국방송실연자권리협회 정책기획팀장 ·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방송실연자권리협회 정책기획팀에서 실연자의 권리 보호를 위한 정책 연구와 기획을 담당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