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94 · JUNE 2026 한국방송실연자권리협회 웹진
드라마 《21세기 대군부인》에서 성공욕에 사로잡힌 여주인공 성희주를 연기한 아이유의 스틸컷
© KOBPRA · VOL.94
character · 요즘 캐릭터

논란 속에서 대중을 사로잡은 성희주의 힘

낯선 욕망과
익숙한 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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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모든 면에서 과장되고 작위적이다. 역사 왜곡 등 거센 논란에 휩싸인 것에서 알 수 있듯 《21세기 대군부인》의 설정과 갈등 구도는 어설프다. 좋게 표현하자면 새로운 가운데 익숙하고, 뻔하면서도 신선하다. 재벌가라는 흔하디흔한 배경에다 현대 입헌 군주제라는 역사적 변주를 입혀 판타지를 더하고, 우리나라 드라마의 인장과도 같은 출생의 비밀을 아예 기본 설정으로 하여 캐릭터를 설계했다. 오로지 사랑의 판타지를 위해 뒤죽박죽 뒤섞인 이 가상의 세계. 그곳에 현실감과 생기를 불어넣은 건 성공욕에 사로잡힌 여주인공 성희주(아이유)의 캐릭터다.

CH 01Fracture in Genre Grammar

마라탕 집에서 만난 김치찌개의 맛

성희주가 뒤집은 것들

아이유가 분한 성희주는 기본적으로 낯설면서 익숙한 면이 있는 캐릭터다. 첩이 낳은 딸이라는 신분의 결핍은 있지만 어쨌든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와 부를 누리며 사는 재벌가의 딸이다. 표독할 정도의 사업 수완과 카리스마로 회사를 이끌고 불리할 때는 자신의 미모를 거리낌없이 내세운다. 지금까지 승자의 길만 걸으며 쌓아 온 셀 수 없이 많은 전리품 위에서 군림하며 살고 있다. 사람들이 뒤에서 사생아라 수군거리는 출생의 오점만 빼면 그녀는 이미 모든 것을 다 가진 아쉬움이 없는 인물이다.

일반적인 기존 로맨틱 코미디 여주인공은 가난하거나 평범하지만 구김 없는 얼굴로 살다가 백마 탄 왕자랑 우연히 만나 행복해진다. 성희주는 이 공식을 일단 갈아엎는다. 운명을 기다리기는커녕 운명의 소용돌이에 소맷자락 하나 말리지 않는다. 남녀 관계에서도 끌려가는 쪽이 아니라 끌고 가는 쪽이다. 언제나 자신의 욕망과 승리가 우선이며, 남자는 유일한 약점인 신분을 뛰어넘기 위한 사다리일 뿐이다. 드라마의 멜로 라인도 바로 이런 그녀의 욕망에서부터 출발한다.

실제로 그녀는 왕실의 실세인 이안 대군(변우석)에게 "저와 혼인하시죠"라며 정략결혼을 제안한다. 그에게 반했다거나 다른 목적은 없다. 지긋지긋한 신분 문제를 일거에 해소하기 위한 전략적 수단일 뿐이다. 물론 의도를 숨기지조차 않는다. 오히려 이 정략결혼의 장점을 집요하게 어필하고 내세운다. 우리 드라마에서 주체적으로 삶을 개척하는 여성 캐릭터가 여러 차례 등장하긴 했지만, 로맨틱 코미디에서 이 정도로 빵빵하게 속물적이고 뻔뻔하게 욕망을 앞세우는 캐릭터라니, 굉장히 낯설다.

드라마 스틸컷에서 자신의 선택을 단호하게 발화하는 성희주
자신의 선택을 발화하는 성희주. 로맨스 장르에서 '거절'과 '요구'의 주어가 여성 캐릭터에게 놓이는 것은 여전히 예외적이다.© Drama Stills / Press
CH 02Subject of Desire

운명에 시나리오가 있다면 직접 쓰는 편

로맨스의 새로운 감정 설계

성희주 캐릭터의 진면목은 위기 국면에서 더욱 짙게 발현된다. 수많은 로코물이 원형으로 삼고 있는 신데렐라 스토리는 사랑이란 이름으로 누군가가 무언가를 해결해 주고 행복해지는 일종의 구원 서사다. 그런데 성희주는 위기의 순간 기꺼이 앞장서 맞서 싸운다. 편전에 불이 나고 그 안에 이안 대군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순간에도, 모종의 암살 음모에 노출된 상황에서도, 그녀는 먼저 이안 대군의 손을 잡고 함께 달린다. 그리고 해결사로 나선다.

일방적으로 구원 받기를 기다리던 존재에서 구원을 주고받는 존재로, 나아가 스스로 구원의 주체로 진화한다. 로코물의 여주인공이 똑바로 응시하는 대상은 남자 주인공의 얼굴이 아니라 해결해야 할 난관이다. 바로 이 점이 21세기의 '로코물 여주'다운 면모이자 매력이다.

성희주는 강하기 때문에 욕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신의 자연스러운 감정이기 때문에 말한다.
강함이 아닌 당연함이다
CH 03Lineage and Rupture

고전 판타지도 포기하지 않는 뻔뻔한 사랑스러움

한국 드라마 여주의 역사 속에서

그런데 성희주가 강하고 넘사벽 캐릭터이기만 하다면, 새롭긴 하지만 우리가 로코물에서 기대하는 특유의 몽실한 설렘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부럽거나 멋지거나 속이 시원할 순 있지만, 응원을 보내고 감정 이입을 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 드라마는 주체적인 것을 넘어 지독한 욕망과 모든 것을 다 갖춘 '여주'를 로맨틱 코미디 특유의 여성 구원 서사 속에 풀어놓는다. 덕분에 익숙한 사랑의 판타지와 호쾌한 여성 서사의 쾌감이 묘한 화학 작용을 일으킨다.

성희주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항상 쟁취했던 그 모습 그대로, 이번에는 자신이 시원하게 부숴뜨린 로코물의 클리셰 위에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당당하게 올라탄다. 애정은 1도 섞이지 않는 비즈니스로 시작한 결혼이 함께 위기를 겪으며 서로를 향한 진심으로 데워지고, 신분을 정복하려던 사람은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해 칼끝을 함께 받아 내는 연인으로 다시 선다. 서로 치유를 받고 모두가 행복해진다는 어디선가 너무나 많이 들어 본 결말이다.

이 드라마는 백마 탄 왕자를 만나 행복해지는 흔한 구원 서사를 다르게 보여 주려 애쓰지 않는다. 백마 탄 왕자를 찾아간 것도, 그를 구해 낸 것도, 관계를 진전시킨 것도, 속마음도 모두 그녀의 뜻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에게 감화된 이안 대군이 신분 사회의 정점인 군주제 자체를 폐지하면서 평생 그녀를 사생아로 묶어 두던 신분의 판이 통째로 사라진다. 모든 것을 스스로 거머쥐는 여자라서 부럽고, 그러면서도 사랑 앞에서 무너지고 채워지는 여자라서 마음을 녹인다.

이런 모순적인 면모를 가진 성희주의 캐릭터는 《21세기 대군부인》의 세계관을 넘어서 오늘날 로코물의 새로운 흐름을 연다. 동시간대 경쟁작 《멋진 신세계》의 신서리(임지연)가 "연모, 혼인 이딴 건 사절"이라고 일갈하면서 겉보기에 센 남자 주인공과의 관계를 리드한다면, 성희주는 시작부터 끝까지 앞장서서 판을 짠다. 방식은 달라도 둘 다 남자에게 이끌리지 않고 관계를 직접 운전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야망을 숨기지 않고 제 이익을 위해 계책을 세우는 캐릭터는 오래도록 악역의 전유물이었지만 성희주는 이를 성공적으로 비튼다.

그리고 한 번 더 트위스트를 준다. 성희주는 주체적 여성의 진취적인 서사나 전복적 쾌감으로 끝나지 않는다. 뻔뻔하게도 기존의 클리셰 위에 다시 자리를 잡고 앉는다는 점이 신선하다. 성희주는 가난하고 해맑은 신데렐라가 아니라 부유하고 욕망에 충실한 여자도 로코물의 여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줬다. 그리고 여성 서사, 여성주의의 틀에도 머물지 않고 끝내 사랑으로 완성되는 여자라는 클리셰를 오히려 당당하게 펼친다. 원하는 건 뭐든 가져다 놓는 그녀의 자유로움과 용기는 역사 왜곡 논란이나 완성도에 관한 질타가 이어지는 와중에도 '나락행'이 아닌 13.8%라는 자체 최고 시청률로 마무리하고, 디즈니 플러스의 글로벌 흥행 콘텐츠로 뻗어 나갈 수 있게 한 이유다.

Writer

김교석 Kim Gyo-seok

TV칼럼니스트

1982년 쿠웨이트에서 태어났다. 걸프전 이후 대구에서 제도권 교육을 받고 자랐다. 2007년 영화주간지 《필름2.0》의 마지막 공채로 입사해 폐간 과정을 지켜봤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영화담론에 대한 회의가 싹텄고, 마침 태동한 스토리텔링을 가미한 TV예능의 화법으로 관심이 옮아갔다. 백상예술대상, 한국방송대상, 서울국제드라마어워즈, 백델데이2025 등의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아무튼, 계속》, 《오늘도 계속 삽니다》, 《K컬처 트렌드 2026(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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